한국어에 나타나는 예외적 격 표지(Exceptional Case Marking) 현상

 

 

 

 

한국어 수준이 고급(advanced)인 한 외국인이

 

"나는 철수가 똑똑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철수를 똑똑하다고 생각한다."

 

이 두 문장이 의미가 같아 보이는데

왜 어떤 경우에는 '-가'를 사용하기도 하고

'-를'을 사용하기도 하는지 모르겠다고 질문을 합니다.

 

이걸 곧바로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한국인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오늘 포스트에서는 이 외국인의 질문에 대한 답을 언어학의 '예외적 격 표지(Exceptional Case Marking; ECM)'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해보겠습니다.

 

 

 

 

 

1. 영어에서의 ECM

 영어에서 ECM은 상위절의 동사가 하위절의 주어인 명사구(NP)에 직접 격을 부여하는 현상을 설명합니다. 다음의 문장들을 보십시오:

 

a. I believe that he is intelligent.

 

• 여기서 'he'는 종속절 'that he is intelligent'의 주어입니다. 이 경우 'he'는 시제절인 종속절 내부의 finite tense에게서 에서 주격(nominative case)을 받습니다. 쉽게 말해, 종속절의 동사가 'is'이므로 그 앞의 명사구는 주어의 지위를 갖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격인 'he'가 오는 게 타당합니다. 상위절 동사 'believe'와는 독립적으로 격을 형성한 겁니다.

 

• 구조: I [believe [that he is intelligent]]
• 이 문장을 기준 구조로 봅니다.

 

 

 

b. I believe him to be intelligent.

 

• 이 문장도 a번 문장과 의미가 별 차이가 없으므로 같은 구조로 파악하여, 'him'은 하위의 비시제절 'him to be intelligent'의 주어라 봅니다. 하지만 주격이 아니라 상위절 동사 'believe'에게서 목적격(accusative case)을 받아 'him'이 되어 있습니다. 하위절 내부에서 주격을 받지 않고 상위절의 동사에게서 목적격을 받는 예외적인 현상이 발생했고, 바로 이를 예외적 격 표지(Exceptional Case Marking) 현상이라 부릅니다.

 

• 구조: I [believe [him to be intelligent]]
• 'him'이 상위절의 동사 'believe'로부터 목적격을 부여받는 ECM 구조입니다.

 

 

 

 

 

2. 한국어 문장에서 ECM 적용 사례

 

 아까 외국인이 질문한 문장들도 같은 방식으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a. 나는 철수가 똑똑하다고 생각한다.

 

• 이 문장에서 '철수'는 종속절 '철수가 똑똑하다'의 주어입니다. 종속절은 독립적인 절로 기능하며, '철수'는 종속절 내부에서 '주격'을 받습니다. 그래서 주격 조사 '-가'가 붙었습니다.

 

• 구조: 나는 [[철수가 똑똑하다]고 생각한다].
• 이 경우를 ECM이 발생하지 않은 기준 구조로 볼 수 있습니다.

 

 

b. 나는 철수를 똑똑하다고 생각한다.

 

• 여기서도 '철수'는 종속절의 주어이지만, 상위절의 동사 '생각한다'에 의해 목적격을 받습니다. 그래서 목적격 조사 '-를'이 붙어 있습니다.

 

• 구조: 나는 [[철수를 똑똑하다]고 생각한다].
• ECM 구조입니다.

 

 

 

 

3. ECM이 일어나는 이유

 

 이유는 잘 모르겠고요, 현상만 서술하자면, ECM은 영어에서나 한국어에서나 주로 생각하다, 믿다, 여기다와 같은 '인식/판단 동사'와 함께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다른 예들도 있긴 합니다.)

 

I believe him to be honest.

They consider her to be a great leader.

I perceive the situation to be dire.

They assumed her to be innocent.

 

나는 철수가 똑똑하다고 생각한다.

→ 나는 철수를 똑똑하다고 생각한다. (ECM)

 

그들은 그녀가 유능하다고 여긴다.

→ 그들은 그녀를 유능하다고 여긴다. (ECM)

 

우리는 그 문제가 중요하다고 믿는다.

→ 우리는 그 문제를 중요하다고 믿는다. (ECM)

 

그들은 그녀가 무죄라고 추정했다.

→ 그들은 그녀를 무죄라고 추정했다. (ECM)

 

 

 

 

 

4. 자연스러움에 대한 원어민의 판단

 저는 한국어 원어민 화자로서, 두 문장이 모두 맞지만, ECM이 일어나지 않은 "나는 철수가 똑똑하다고 생각한다"가 더 자연스럽고 일반적인 표현으로 느껴집니다. 제가 한국어를 발화할 때 이 구조를 더 선호하기 때문이겠죠. ECM 구조를 많이 내뱉는 한국어 원어민 화자들은 ECM 구조가 더 자연스럽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나는 철수를 똑똑하다고 생각한다"라는 문장은 '철수'라는 대상에 초점을 두고 강조하고자 할 때 쓰는 거라는 설명이 있긴 한데... 솔직히 별로 공감은 안 되네요. 😅